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대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종교, 민족, 역사, 국제정치가 얽힌 복합적인 문제다.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과 아랍 민족주의가 충돌하면서 지역은 긴장 속에 빠졌다.
1947년 유엔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분할 안은 유대국과 아랍국을 각각 세우자는 것이었지만, 이를 유대인들은 수용한 반면, 아랍국들은 거부했다. 그 결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고,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되었다. 이후 1967년 6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주요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1964년 설립되어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이어갔고, 이스라엘은 이를 테러 행위로 간주했다. 이처럼 양측 간의 오랜 적대 관계는 수십 년 동안 무수한 전투와 테러, 보복을 낳았고 중동 평화는 요원한 듯 보였다.
2. 협상을 향한 비밀 접촉
1980년대 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1987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발생한 제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는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강경 일변도 정책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동시에 PLO 역시 무력 투쟁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현실 인식 속에 협상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1년 걸프전 이후였다. 미국은 중동 질서 재편의 일환으로 아랍-이스라엘 평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1991년 마드리드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가 같은 회담장에 앉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비록 뚜렷한 성과는 없었지만, 이는 이후 협상의 기반이 되었다.
1992년 이스라엘에서 중도좌파 정당 노동당이 정권을 잡으며 분위기는 급변했다. 새 총리 이츠하크 라빈은 현실적인 안보와 정치적 해결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며 PLO와의 접촉을 허용했다. 이 과정에서 노르웨이 정부의 중재로 비밀 협상이 오슬로에서 시작되었다. 이 비공식 협상은 정식 외교 채널이 아닌 비공식 루트를 통해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3. 오슬로 협정의 체결
1993년 8월, 오슬로 비밀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스라엘과 PLO는 서로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과 점진적 자치 확대에 합의한 문서에 서명하기로 했다. 이 협정은 다음 달인 1993년 9월 13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공식적으로 서명되었고,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장면에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었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 사이에서 이를 주선했다. 이른바 오슬로 협정은 이 장면을 통해 전 세계인의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국민의 합법 대표로 인정하고, PLO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며 무장 투쟁을 포기한다.
- 5년 동안의 과도기를 설정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일부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행정과 경찰 권한을 점진적으로 행사한다.
- 협상 후반기에는 동예루살렘, 난민 귀환, 유대인 정착촌, 최종 국경 등에 대한 ‘최종 지위 협상’이 진행된다.
- 가자지구와 예리코 시부터 자치가 시작되며, 이후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이 협정은 중동 평화에 대한 기대를 높였고, 1994년에는 라빈, 아라파트, 그리고 중재자인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이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 오슬로 협정의 한계와 유산
오슬로 협정은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되었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낙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협정을 “항복문서”로 보는 급진 세력이 반발했고, 이스라엘 내에서도 극우 세력은 팔레스타인에 양보하는 것을 “안보 포기”라고 규정하며 협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95년 11월, 오슬로 협정의 주역인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 청년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평화에 대한 기대를 크게 꺾었고, 이후 이스라엘 정권은 우파 리쿠드당의 네타냐후가 장악하면서 협정 이행은 점차 지연되거나 후퇴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자치 확대가 느리게 진행되었고,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은 지속되면서 협정의 신뢰는 무너졌다. 여기에 2000년 제2차 인티파다가 발발하며, 양측 간의 충돌은 다시 격화되었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최종 지위 협상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났고, 오슬로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하마스의 부상,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분열, 이스라엘의 안보장벽 건설 등으로 평화는 더 멀어졌다.
오슬로 협정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PLO가 상호 인정과 협상의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평화 가능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지를 끌어냈으며, 분쟁 해결을 위한 단계적 접근과 자치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주요 쟁점에 대한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양측의 상호 불신과 내부 극단주의 세력의 반발, 국제적 보장 체계의 미흡으로 인해 협정은 실질적으로 실패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지속과 분리장벽 설치 등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불만을 키우며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오슬로 협정은 중동 평화의 도전을 상징한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적대 관계에 있던 양측이 대화를 시작하고, 서로를 인정한 최초의 공식 합의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 협정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까지도 중동 평화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단발성의 서명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과정임을 오슬로 협정은 보여주었다. 다시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그 출발점은 여전히 오슬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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